다문화가정 첫 부녀회장 오스기 사토미씨
오히라 구니에(일본)

▲ 오스기 사토미 씨
2009년도도 벌써 끝나가는 12월 하순이다.
올 한 해 동안 묵묵히 마을 부녀회장님으로 일해 온 다문화가정 오스기 사토미(44, 일본, 남편 장강진) 씨가 있다.

그녀는 부귀면 두남리 마을 부녀회장으로 진안군에서는 다문화가정 첫 부녀회장이다.
가정에서는 세 명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엄마로써, 집안에서는 가정 경제를 산출해나가는 농사꾼 아내로써, 또 두남리 마을을 이끌어가는 부녀회장으로써 너무나도 바쁜 한 해였을 것이다.
그런 생활환경 속에서 늘 꿋꿋하게 살고 있는 사토미 부녀회장님에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보따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1996년 7월) 문화차이를 너무 많이 느꼈어요. 일본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 같이 느껴졌지요. 세탁하는데도 세탁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세탁하고 계셨고요. 아이를 가졌을 때 이야기에요. 매월 전주에 있는 병원에 정기 검진하러 가는데 '무엇 때문에 병원을 가느냐?'라든가, 병원에서 출산을 했는데 '집에서 출산하면 좋았을 걸'하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그래서 보건소를 이용하려고 하니까 전문의가 없었고요."

사토미 부녀회장님 댁은 주로 고추와 쌀농사를 하고, 생계를 이끌고 있다.
"시어머니께서 건강하게 계시는 동안 김치랑 한국음식을 빨리 배워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많이 노력했지요. 한국 농촌 아주머니들은 많이 부지런하고, 체력도 있으시고 해서 너무 놀랐어요. 저는 똑같이 일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상당히 어려워요."

"저는 일본 오사카에서 6년 정도 공무원 생활을 했어요. 초등학교 때 문득 '오스기'라는 나의 성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는 시집을 가면 시댁의 성으로 바꿔요. 너무 나의 성씨를 좋아했었거든요. 식물이라든가, 자연을 좋아해서 자연 속에서 살 수 있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도 했지요. 그래서인지 특별히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돌이켜보면 저의 운명이었는가 봐요.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녀는 1995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축복결혼 인연으로 장강진 씨를 만나게 됐다. 사토미 부녀회장은 아들 셋(12살, 6살, 4살)의 엄마이다.

"시집을 와서 14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남편과 아이들이 10번이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남편은 오른쪽 다리를 골절해 수개월 입원을 했었고, 아이들은 감기에 걸리면 폐렴까지 가는 등 몸이 아파졌어요."
"첫 아이를 키우는데 언어문제가 커서 엄마로써 기본적인 교육을 못해서 불안했어요. 유치원 교육비 부담도 컸고요."

하지만 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진안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영재교육 학생으로 뽑혔을 때는 어느 때보다 기뻤다고 한다. 지금도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잘 하고 있다.
그녀는 다문화 가정으로써 진안군 부녀회장 1호이다.

"한국의 아주머니 분들이 무엇인가 하나라도 저에게 가르치시려고 하는 마음과 모습을 볼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정말 봉사의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정말 복 받아야 한다고 생각 했어요." "1년 동안 마을일을 제가 한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마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1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어요. 저의 부족한 부분을 키워주셨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이에요."

"외국인이다 보니 집에 틀어박히기가 쉬운데 부녀회장이라는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나가서 마을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활동하게 되어 정말 소중한 경험을 해 너무 기뻤고요."
그녀는 농촌에 정착한 다문화 가정이다.

"농업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공부와 연구를 해서 발전해 나가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외국에서 시집와 여기 농촌에 와서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국여성들처럼 경제자립과 아이들 교육문제로 도시로 유출해 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농촌에서 안심하고 살림을 꾸밀 수 있어야 되는데……. 앞으로 농촌에 대해 불안을 느껴져요."

그녀는 친정에 3년에 한 번 정도 아이들과 함께 방문한다. 임신과 농가일 관계로 겨울철에 가는데, 친정에서는 그렇게 기뻐해 주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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